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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ntuk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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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Z-MCP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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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sauteuse) WALTZ-MCP04
Waltzes from Seoul

"All the bright precious things fade so fast. and they don't come back." so I wish we could just run away.


Scandinavian folk dance

WALTZ-MCP05

논리가 필요 없는 삶. 일단 울고불고, 바닥에 엎어져서 뻗대보는 삶. 부모든 누구든 당신네 사정은 모르겠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 마음껏 떼쓰던 삶. 누구나 유년기의 한때, 그렇게 ‘떼쓰는 삶’ 이 있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나 또한 그런 삶이 있었다. 나는 성격이 차분한 대신 소위 ‘똥고집’ 에 알량한 자존심까지 강했던 탓에 울거나 소리 지르는 식으로 떼를 쓰지 않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굳어 서있는 방식으로 떼를 썼다. 그 ‘떼’를 당해내야 하는 입장에선 오히려 더 괴로운 방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김해에 드물게도 흰 눈이 폴폴 나리던 유년기의 어느 겨울,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까지 버스도 쓰레기 수거 차량도 오지 않는 제도권 밖의 삼계동 귀퉁이에 살았다. 가난을 이유로 어린 자식에게 추위와 서러움을 가르칠 수는 없던 엄마는 당시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동상동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 재첩을 사와 뽀얀 재첩국을 끓였다. 지금도 입이 짧아 날것, 버섯 같은 것들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엄마의 그 고생을 모르고 재첩국에 입도 대지 않았고, 엄마는 혼도 낼 겸 재첩국도 먹일 겸 나를 집 밖으로 내쫓으셨다. 살을 에는 추위에, 어지간하면 “죄송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갈 법도 하건만, 나는 몇 십 분을 독하게 서서 ‘무언의 떼’를 썼고, 그 덕분에(?) 재첩국은 먹지 않았지만 더 크게 혼나야만 했다.
비록 혼날지언정, 그렇게 막무가내로 떼쓰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던 시절. 삶 중에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저 “힘들다” 한 마디를 건네는 그 일조차 피차 힘들게 살아가는 서로에게 짐이 될까 입을 꾹 다물어야 하는 어른의 시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말이다. 떼쓰는 삶, 그것도 그 시절의 특권이었으리라.
프리랜서의 삶이 다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내가 가진 핵심 역량을 파생시켜 이런저런 일들을 겸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그 중 하나가 재수학원의 국어 강사 겸 자기소개서 컨설턴트였다. 재수를 해본 적도 없고, 딱히 치열한 고3 수험생 시절을 보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대학에 간다’ 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한다. 수능을 친다. 원서를 넣는다. 신입생이 된다. 끝.
그랬던 내가 재수생들을 마주하면서 요즘의 학생들이 얼마나 ‘애쓰는 삶’ 을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아니 사실 더 애쓰는 학생들은 오전 6시 반에 직접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밤 11시에 직접 학원 문을 닫고 나가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그런 학생들 모두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뭐 이런 대학을 희망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적당히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은(어디까지나 십수 년 전의 내 기준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가장 푸른 청춘의 한때를 네모난 학원의 네모난 책상에서 네모난 책과 시험지를 붙들고 보낸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꾸는 꿈은 ‘네모의 꿈’ 보다 거창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 지점에서, 비록 학생과 선생으로 만났지만 나 역시 비슷하게 ‘애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뭐 대단한 직업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먹고 살만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원래 학과를 놔두고서 취업률 집계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국어국문학과로 전과했으니. 대작가가 될 것 같던 오만과 편견의 시간은 겨울 노을보다 빨리 저물고, 나는 꿈을 위해 ‘글을 쓰는’ 대신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애쓰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제 삶을 위해 애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목적의식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코앞의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한, 그런 ‘애쓰는 삶’ 이 애처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쓰느라 애달프고, 애달파도 애써야 했던 시절. 내 이십대는 애쓰느라 닳아버린 열정을 남겼다. 몽당연필처럼 뭉툭하게 닳아버린 열정으로 쓰는 모든 꿈과 희망들은,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번지곤 했다.
(중략)...
00세 시대,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내가 하기에 가소롭고 교만한 말일 수도 있으나, 떼쓰고 애쓰고 그러다 이제 글 쓰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네 삶은 결국 이야기이고 뭐가 됐든 일단 쓰고 나면, 그게 다 내 삶이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건, ‘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일부가 빈 페이지로 넘어가버리니까. 진득하게 몇 개월, 몇 년 열중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진리를 늦게 깨달았다. 열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불’ 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어떤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속도나 방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하루도 의미 없는 날은 아니라는 것을. 떼쓰는 것이 유년기의 특권이고, 애쓰는 것이 우리 삶의 숙명이라면 글 쓰는 것은 내가 선택한 내 삶의 방편이다. 무엇이 되었건, 쓰자. 쓰는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삶이니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날엔 걱정 없이 펑펑 돈 쓰는 날도 하루쯤 오지 않을까. 안 와도 어쩔 수 없고.
김경빈
ICBM LICKIT-MCP18
Hesitation Waltz WALTZ-MCP07
Sussex from 1804 WALTZ-MCP08
Kunz Haas WALTZ-MCP09



Dorothea Lieven

WALTZ-MCP10

바다를 본다. 푸른빛이 돌기도 하고 검은빛이 돌기도 하는 바다를 본다. 바다는 대단히 거대하고 정교한 질서를 품고 있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횡대의 무리가 한줄씩, 한줄씩 모래를 딛고 뭍으로 올라온다. 진시황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상상했던 병마용갱에 영혼이 깃들면 이런 모습일까. 그들이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인지 혹은 힘있는 창질을 하는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보고 있는 바다엔 유일무이한 질서가 잠들어 있다.

파도를 본다. 점점 커지나 싶더니 이내 꺾이곤, 내 발치에 닿을 듯 말 듯 미끄러져 오는 파도를 본다. 밀려오는 파도엔 비교할 바 없는 커다란 혼돈이 내재되어 있다. 줄을 서서 차례차례 밀려오는 파도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중간에 줄이 섞이기도 하고, 잘 이어져 있던 줄이 끊겨 있기도 하고, 모래와 맞닿아 있는 곳엔 밀려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는 파도가 뒤에서부터 한 줄씩 들어오는 파도와 부딪히고 엉겨 불규칙한 해안선을 만든다.
바다에서 일하던 집에서 태어나, 바다를 끼고 살았고, 취미가 낚시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참 많은 바다를 보았다. 띄는 빛깔도, 맡는 냄새도, 해안선의 길이도, 앞의 모래와 바위도, 온도도, 제각각 다른 게 바다이지만 파도 없는 바다는 없었다.



Three Word

WALTZ-MCP11

잃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켜온 것들을 어느 하나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다. 먼지 쌓인 물건들을 집 안에 방치하고, 묵은 감정들을 내면에 간직한다. 묵어서 나는 쉰내에 모른 채 반응하고 태연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행동의 수수께끼다. 방 청소와 환기를 주기적으로 하는 우리는, 정작 내가 조성한 생활 주변의 묵은 것들은 치우지 않고 비슷한 사람들과 줄을 맞춰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맞춰 가는 줄은 어디로 향하나. 무엇도 잃지 못하고 어깨 위에, 발 밑에 질질 끌고 가는 그 모든 것들, 옆 사람과 줄을 서 있으면 그것들은 하나의 커다란 산맥이 된다. 우리는 해안가로 간다. 우리는 줄을 맞추어 해안가로 가다가, 우리가 짊어진 짐의 높이와 지탱하는 다리 길이의 비가 3:4를 조금 넘어가는 순간 스러지겠지. 파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스러지려 살아가는 것인가 생각해본다. 누구도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지만, 누구나 스러지기 위해 살아가는 모순. “버티는 삶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서점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럴 일은 없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그 책의 후작을 청탁한다면, “스러지는 삶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쓰고 싶다. 버티는 삶의 목적은 스러지는 삶이라 생각하기에.
이명우
Satie No.1 WALTZ-MCP01